자전거 이야기
요즘 나는 자전거 애찬론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발명품들보다 값져 보인다. 자전거만큼 인간에게 좋은 선
물은 거의 없을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이전에 자전거애찬론자가 많았었다.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전거를 타면
서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찬사했다. 또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Learn to ride a bicycle, You will not regret it if you live)고 했다. 이들 외에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피카소(Pablo Picasso)도 열렬한 자전거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자동차의 문제를 더 이상 도로를 넓히거나 교통신호나 체계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더우기 자동차사고는 인체에 치명적
인 피해를 주기때문에 자동차에 내어준 거리를 자전거와 보행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자전거중심의 도시, 보행자중
심의 도시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자전거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만개하다가 20세기 초반의 My Car 시대의 도래로 거의 사라질 위기에 있다가 제3세계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만개하고 있고, 선진국에서는 스포츠나 여가,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유력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부상하면서 제 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정확히 통계를 잡지 못하지만 세계의 자전거 인구는 대략 10억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이미 세계 제일의 교통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전거는 사실 '자동차의 아버지'와 같다. 아니 어쩌면 사촌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자동차 브랜드들인 포드(FORD), 오펠(OPEL : 독일회사였는데 GM에 합병됨), 시트로엥(CITROEN : 프랑스 자동차회사), 푸조(PEUGEOT : 프랑스 자동차회사) 등 초기 자동차 회사들이 자전거 판매점을 시작으로 한 곳이 대부분이다. 1900년대 초반에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전 세계적으로 7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이 대부분은 자전거를 판매하는 것이 주종목이고 자동차는 부수적으로 주문해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현대 자동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포드(Henry Ford)만 하더라도 자전거 판매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다. 사실 자동차의 엔진기술을 제외한 모든 기술은 거의 자전거의 발명에 의존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 발전의 핵심기술인 속도기어(variable-speed gears), 바퀴(the shaft driven wheel), 페달을 돌리는 베어링(improved ball bearings), 공기압 타이어(the pneumatic tire), 완충장치(suspnsion) 등 자전거의 핵심기술을 이용해서 타이어 4개에 가솔린엔진이나 디젤엔진만 얹으면 사실 자동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전거점포가 자동차회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자전거는 언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자전거를 연구한 학자들은 자전거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자전거(wheel)을 이용했다는 문헌이 있는 것으로 보아 페르시아가 최초일 것으로 짐작하나 증거는 없다. 역사적으로 1493년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Codex Atlanticus'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 시초를 삼는다. 그 그림에는 톱니바뀌에 체인(chain)이 달린 자전거 비슷한 wheel로 기차를 끄는 스케치가 그려져 있는데 ball-bearing까지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다빈치가 직접 그린 그림인지 아니면 그의 그림 문하생들이 그린 화첩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지만 다빈치가 오늘날의 헬리콥터 모형이나 비행기 모형까지 디자인한걸보면 아마도 다빈치의 작품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후 1665년 John Evelyn 이라는 사람의 일기장에 'wheel for one to run races in~'이라는 표현이 있어 자전거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또한 증거가 없고, 1700년대 루이 16세때 프랑스의 M de Sivrac이라는 사람이 나무로 된 두개의 바뀌 축(flame)을 발로 굴려서 가는 것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 원시 자전거는 마리 앙뜨와네뜨(Marie Antoinette)에게 바쳐져 베르사이유궁전에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오고 있지 않다.
그후에 최초의 자전거가 나타난 것은 1817년 8월 파리에서 첫 전시된 "Draisienne"라고 불리는 원시자전거인데 이 자전거는 독일인 발명가인 Karl von Drais가 개발했고 3년후인 1820년에 'Laufmaschine'(달리는 기계라는 뜻) 혹은 영어식으로 'velocipede'라고 불리웠고 '장난감 말'이라고도 칭해졌다. 이 자전거는 체리나무로 만들었고 wheel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페달도 없었고 발로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1시간당 9mile(약 14.5km) 가량의 속도가 나왔다고 하니 생각보다 빨랐다. 그후 'Laufmachine'에서 한단계 진전된 첫 페달(pedal) 자전거가 1863년 에 프랑스인 Pierre Lallement 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자전거는 자전거 페달이 앞바퀴옆에 달려있었고, 자전거 재질도 철도 만들어져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그후 1871년에 제일모직의 브랜드인 Bean Pole의 로고(logo)로 유명한 '큰 바뀌자전거'(High-Wheeler)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렇게 앞바뀌가 큰자전거가 나타나게 된 것은 바뀌축이 크면서 그만큼 속도가 높아지고 아직 고무튜브타이어가 나오기전이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때에 자갈이나 흙길에서 장애물에 충격이 적고 잘 타고넘는 효과적인 기능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 자전거 또한 거의 사람 키높이(약 1.2~1.6m)의 바뀌축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사람들이 타기에 용이하지 않고 대중화되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었는데 대신 이 자전거가 나오면서 공식적인 자전거 경기대회와 자전거 하이킹이 일반화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888년에 와서야 자전거 이용에 과히 혁명이랄 수 있는 공기압타이어가 개발되게 된다. 공기압자전거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타(Belfast)에 살았던 스코틀랜드인 John Dunlop이 발명했는데 이 공기압타이어의 등장으로 바퀴가 작아도 울퉁불퉁한 길과 장애물을 지날 수 있고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면서 High-Wheeler 자전거는 역사의 무대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후 체인(chain), 베어링(ball bearings), 완충장치(suspension), 다이아몬드모양의 프레임(flame) 등이 개발되면서 거의 자전거 디자인의 완성을 가져오게 된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시 Kurpfälzisches Museum 에 전시된 최초의 자전거 Laufmaschine 의 모습. 처음 프랑스에 선보인 것은 1817년에 만들어졌고, 이것은 1820년의 것이다. 페달도 없고,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스코틀랜드인 KirkpatrickMacMillan 과 Gavin Dalzell 이 개발한 초기 자전거로 불리는 velocepede의 모습(위사진)
손과 발부분의 크랭크가 뒷 축에도 연결되어 있는데 페달(pedal)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실내에서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자전거는 재질은 철로 되어 있는데 크랭크축이 없는 것으로서
자전거의 발달이 어떻게 이루어져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아래 사진)
사실상 근대적인 자전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863년에 프랑스인 Pierre Lallement 가 만든 pedal 자전거의 모습. 이 자전거에 이르러서야 발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달의 힘으로 동력을 앞바뀌에 전달해서 자전거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무주변에 철로 마감한 형태의 wheel을 가졌고 아마도 이 기술은 마차기술에서 빌려온 듯 하다.
큰 바퀴자전거(High-Wheeler)를 타는 신사의 모습(위 사진) 1871년에 High-Wheel 자전거가 개발되었고, 1888년이후 공기압타이어가 개발된 이후 거의 퇴조되었는데 매니아들은 여전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제법 현대적인 자동차가 나온 것이 1900년초인것과 다른 자전거들이 오늘날과 형태가 거의 유사한 자전거인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반 사진으로 짐작된다.
High-Wheel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의 모습(아래 사진)
물은 거의 없을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이전에 자전거애찬론자가 많았었다.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전거를 타면
서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찬사했다. 또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Learn to ride a bicycle, You will not regret it if you live)고 했다. 이들 외에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피카소(Pablo Picasso)도 열렬한 자전거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자동차의 문제를 더 이상 도로를 넓히거나 교통신호나 체계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더우기 자동차사고는 인체에 치명적
인 피해를 주기때문에 자동차에 내어준 거리를 자전거와 보행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자전거중심의 도시, 보행자중
심의 도시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자전거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만개하다가 20세기 초반의 My Car 시대의 도래로 거의 사라질 위기에 있다가 제3세계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만개하고 있고, 선진국에서는 스포츠나 여가,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유력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부상하면서 제 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정확히 통계를 잡지 못하지만 세계의 자전거 인구는 대략 10억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이미 세계 제일의 교통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전거는 사실 '자동차의 아버지'와 같다. 아니 어쩌면 사촌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자동차 브랜드들인 포드(FORD), 오펠(OPEL : 독일회사였는데 GM에 합병됨), 시트로엥(CITROEN : 프랑스 자동차회사), 푸조(PEUGEOT : 프랑스 자동차회사) 등 초기 자동차 회사들이 자전거 판매점을 시작으로 한 곳이 대부분이다. 1900년대 초반에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전 세계적으로 7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이 대부분은 자전거를 판매하는 것이 주종목이고 자동차는 부수적으로 주문해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현대 자동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포드(Henry Ford)만 하더라도 자전거 판매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다. 사실 자동차의 엔진기술을 제외한 모든 기술은 거의 자전거의 발명에 의존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 발전의 핵심기술인 속도기어(variable-speed gears), 바퀴(the shaft driven wheel), 페달을 돌리는 베어링(improved ball bearings), 공기압 타이어(the pneumatic tire), 완충장치(suspnsion) 등 자전거의 핵심기술을 이용해서 타이어 4개에 가솔린엔진이나 디젤엔진만 얹으면 사실 자동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전거점포가 자동차회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자전거는 언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자전거를 연구한 학자들은 자전거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자전거(wheel)을 이용했다는 문헌이 있는 것으로 보아 페르시아가 최초일 것으로 짐작하나 증거는 없다. 역사적으로 1493년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Codex Atlanticus'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 시초를 삼는다. 그 그림에는 톱니바뀌에 체인(chain)이 달린 자전거 비슷한 wheel로 기차를 끄는 스케치가 그려져 있는데 ball-bearing까지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다빈치가 직접 그린 그림인지 아니면 그의 그림 문하생들이 그린 화첩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지만 다빈치가 오늘날의 헬리콥터 모형이나 비행기 모형까지 디자인한걸보면 아마도 다빈치의 작품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후 1665년 John Evelyn 이라는 사람의 일기장에 'wheel for one to run races in~'이라는 표현이 있어 자전거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또한 증거가 없고, 1700년대 루이 16세때 프랑스의 M de Sivrac이라는 사람이 나무로 된 두개의 바뀌 축(flame)을 발로 굴려서 가는 것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 원시 자전거는 마리 앙뜨와네뜨(Marie Antoinette)에게 바쳐져 베르사이유궁전에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오고 있지 않다.
그후에 최초의 자전거가 나타난 것은 1817년 8월 파리에서 첫 전시된 "Draisienne"라고 불리는 원시자전거인데 이 자전거는 독일인 발명가인 Karl von Drais가 개발했고 3년후인 1820년에 'Laufmaschine'(달리는 기계라는 뜻) 혹은 영어식으로 'velocipede'라고 불리웠고 '장난감 말'이라고도 칭해졌다. 이 자전거는 체리나무로 만들었고 wheel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페달도 없었고 발로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1시간당 9mile(약 14.5km) 가량의 속도가 나왔다고 하니 생각보다 빨랐다. 그후 'Laufmachine'에서 한단계 진전된 첫 페달(pedal) 자전거가 1863년 에 프랑스인 Pierre Lallement 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자전거는 자전거 페달이 앞바퀴옆에 달려있었고, 자전거 재질도 철도 만들어져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그후 1871년에 제일모직의 브랜드인 Bean Pole의 로고(logo)로 유명한 '큰 바뀌자전거'(High-Wheeler)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렇게 앞바뀌가 큰자전거가 나타나게 된 것은 바뀌축이 크면서 그만큼 속도가 높아지고 아직 고무튜브타이어가 나오기전이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때에 자갈이나 흙길에서 장애물에 충격이 적고 잘 타고넘는 효과적인 기능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 자전거 또한 거의 사람 키높이(약 1.2~1.6m)의 바뀌축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사람들이 타기에 용이하지 않고 대중화되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었는데 대신 이 자전거가 나오면서 공식적인 자전거 경기대회와 자전거 하이킹이 일반화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888년에 와서야 자전거 이용에 과히 혁명이랄 수 있는 공기압타이어가 개발되게 된다. 공기압자전거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타(Belfast)에 살았던 스코틀랜드인 John Dunlop이 발명했는데 이 공기압타이어의 등장으로 바퀴가 작아도 울퉁불퉁한 길과 장애물을 지날 수 있고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면서 High-Wheeler 자전거는 역사의 무대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후 체인(chain), 베어링(ball bearings), 완충장치(suspension), 다이아몬드모양의 프레임(flame) 등이 개발되면서 거의 자전거 디자인의 완성을 가져오게 된다.
손과 발부분의 크랭크가 뒷 축에도 연결되어 있는데 페달(pedal)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실내에서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자전거는 재질은 철로 되어 있는데 크랭크축이 없는 것으로서
자전거의 발달이 어떻게 이루어져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아래 사진)
High-Wheel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의 모습(아래 사진)
1892년이후에 나온 'The Humber' 자전거. 오늘날처럼 다이아몬드 형 프레임, 완충장치, 브레이크, 공기압타이어, 톱니바퀴 기어 등이 달려있어 거의 현대 수준의 자전거로 발전하면서 급속히 자전거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자전거는 미국에서 부흥해서 미국에서부터 차츰 멸망해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유럽에서 처음 개발되었으나 그 부흥은 미국에서 하게 된다. 최초의 페달자전거인 velecipede를 만든 프랑스인 Lallement는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Lallement and James 라는 회사를 동업으로 만들게 된다. 자전거가 처음 나타났을때 도로에서 종종 마차와 부딪히는 일이 발생해서 이 일로 Lallement는 두번이나 체포당하게 된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자전거가 위험하다고 법으로 집에서 외에는 못타게 정하기도 했다. Lallement 는 미국에서 성공을 못하고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는데 실제 미국에서 가장 큰 자전거 회사를 연 사람은 Albert A. Pope 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신발, 작은 기계류 장사를 하던 사람인데 1871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박람회(Fair)에 전시된 영국 자전거를 보고 자전거를 수입해서 미국에서 판매하게 된다.
그는 1878년에 "Columbus" 모델을 생산해서 그당시 판매가격으로 313달러($)에 처음 판매한다. (그 당시 미국 노동자의 하루 일급이 평균 1달러($)도 못미쳤으니 그 돈은 평균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다) 그는 여성들을 위한 마케팅기법을 도입해서 자전거점포 도색을 '핑크색'과 '블루색'으로 색칠할 정도였는데 실제 25~30%가 여성고객들에게 팔렸다. 그 당시 최고의 선물이 시계였는데 점차 자전거가 부인이나 연인을 위한 최고의 선물로 각광받기 시작한 시점이다. 'Columbus' 자전거는 점차 많이 팔리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격이 1890년 150달러, 1895년 100달러(약 40만대가 팔렸다고 함), 1897년 75달러(1894년에 중고자전거가 15달러 정도였음)로 점차 내려갔고 1890년대말에는 자전거타는 인구만 수백만명이 자전거를 탔고 1900년에 미국에만 1,000만대의 자전거가 있었다고 한다. 1883년 매사추세츠 전시회는 18개의 회사가 참여했는데 1896년 시카고(chicago) 전시회땐 225개, 뉴욕전시회에는 400개의 회사가 참여했으니 19세기말은 과히 자전거혁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0년경 보스톤에 회사를 둔 Pope 회사의 삼륜자전거의 홍보전단모습. 160달러(당시 반년치 월급에 해당)이고 power-gear가 있으면 180달러라는 내용이 이채롭다.
1895년 Pope 사의 현대식 자전거의 홍보전단내용. 100달러로 가격이 내린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보스톤에서 시작했는데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버팔로 등의 지사에서도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자전거가 약 약 40만대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완전히 자전거가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99년 Pope 사의 자전거 홍보전단. 가격이 엄청나게 내려갔다. 25달러~ 75달러까지 다양한 디자인과 품질의 자전거들이 양산되었음을 보여주는 홍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자전거회사이며, 자동차 또한 최선으로 조립한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또한 자전거는 경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는데 1895년에 시카고 우체국 집배원 150명이 시범적으로 마차에서 자전거로 바꾸었는데 1년에 5천달러($)의 지출을 줄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시카고 병원에서는 '마차 앰블런스' 대신 '자전거 앰블런스'를 사용하였는데 마차에 비해 경이적으로 속도가 빨라 16분만에 3마일을 달렸다고 한다. 또한 1894년에 보스턴 시에 자전거타는 경찰관이 처음 생겼는데 점차 필라델피아, 시카고, 뉴욕으로 확산되었다. 이 자전거타는 경찰관은 1987년 미국 시애틀(seattle)에서 다시 부활하였는데 실제로 시내에서는 자동차보다 빠르고 자동차가 약 23,000$ ~ 28,000$ 정도인데 반해 자전거는 불과 1,200$ 이고, 자동차 1년 유지비가 4~5,000$ 인데 반해 자전거는 겨우 200$ 정도 든다고 하니 정말 일석이조인 셈이다. 현재 자전거타는 경찰관은 미국 전역에 퍼져있고, 유럽 또한 오래전부터 자전거타는 경찰관을 흔하게 볼 수있다.
당시 자전거타는 사람은 말장사, 영화하는 사람, 전차운전하는 사람 등이 매우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전거사려고 영화안보고, 영화관에서 데이트하기보다 자전거타고 가서 데이트하고, 전차를 타지않고 마차를 사지 않아 뉴욕에서만 해마다 3만마리 이상의 말을 없앴고, 미국 전역에서 25만 마리의 말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계를 파는 보석상들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았고, 자전거타는 사람이 늘어나서 담배 시가(cigar) 또한 7백만개가 덜 팔렸다고 하니 과히 자전거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987년 다시 부활한 자전거탄 경찰관의 모습. 시위대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다. 도로 점거한 시위대를 정말 평화적으로 지키는 경찰관의 모습이다. 어째 한국 경찰과 대비되는 모습이네요.
필자가 사는 인디아나폴리스의 자전거탄 동네경찰관의 모습. 자전거 하이킹 나온 사람같다.
자전거는 사회문화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특히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자전거의 출현은 사회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여성들에는 더더욱 그랬다. 1800년대말의 미국뿐아니라 전 세계는 그래도 사회나 개인의 변화가 빠른 그런 사회는 아니었다. 가족중심이었고, 마을과 작은 Town을 형성하며 그 경계안에서 이웃하며 생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보스톤, 시카고, 뉴욕같은 대도시들이 생겨나고 있었지만 대다수 시민들의 삶은 작은 경계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자전거의 출현은 개인의 이동을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다. 그당시 자전거의 출현이 '하나님의 천사가 출현(scientific angel)'으로 이해하거나 '악의 모습(scientific devil)'으로 이해하거나 전혀 상반된 입장들이 존재했다. 그럴만도 한게 주일에는 교회가서 함께 식사하고 아이들이 시끄럽게 노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는 분위기에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가거나 심지어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1895년에 시카고에서는 J. H. Messenger라는 목사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교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교회를 사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1896년에 뉴욕 장로교총회는 일요일에 자전거타는 행위는 죄를 짓는 행위라고 하면서 금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여성들에게서 일어났다. 1890년대 자전거는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다. (Cycle is a symbol of "freedom machine") 1890년대에 여성투표권을 요구하는 운동과 여성 의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일부 있었는데 자전거의 출현은 이를 일거에 바꾸어 버렸다. 자전거와 여성해방를 소재로 한 소설과 광고, 사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고 실제 자전거는 남녀가 쉽게 교외로 나갈 수 있게 만들므로 여성의 성적자유를 상징하기도 하였고, 자전거를 타면서 18세기말까지 고수하고 있었던 '코르셋입은 여성'을 완전히 벗어나 오늘날의 바지입은 여성의 탄생을 앞당겼다. 또한 그동안 서양 남자는 여성에게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는게 에티켓이었는데 자전거를 타면서는 간단하게 손인사 하는게 에티켓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들은 딸이 보호자없이 극장에 가는 것을 허락치않았는데 자전거를 타면서부터 보호자로부터 여성이 자유롭게되기 시작했다. (플로리다는 1897년까지 여성이 자전거를 거리에서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자전거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세대간의 gap을 단축시키는 역할을 했고(그 당시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하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음. 이는 엄청난 변화임) 심지어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890년대에 이미 자전거 동호회(club)들이 미국의 웬만한 도시들에 다 있었는데 지도(map)가 없었던 때에 코스를 정하는 map에 누군가 정확하게 설명하면 그게 route가 되고, 한번 움직이면 1,000명 ~ 10,000까지 움직이는 자전거 행렬이었기때문에 동호회 내의 질서와 지도자(leader)를 직접 정하는 등 다양한 민주주의 운영원리가 발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896년 뉴욕에서의 자전거 퍼레이드(Parade)에는 10만명이 참여하였는데 상원의원과 자전거연맹의 회장이 인사말을 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타는 것은 초기에 법률적 제약이 심했는데 1891년에 일리노이주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마차를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리도록 함으로써 자전거 타는데 제약을 두었고(마차타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가 우위였던 때라고 보면 될 듯), 1883년에 뉴욕시는자전거를 타고 센트럴파크(centeral park)에 진입하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앞의 글 '자동차를 길들이는 사회만들기 (2)에 쓴것처럼 1890년대에 길에는 마차(carriage), 말이 끄는 strettcar(전차처럼 노면을 달리는 것), 전차(trolley), 많은 자전거와 일부 자동차가 혼재되어 있어서 교통혼잡이 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교통법규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1897년에 가서야 뉴욕에서 처음으로 보행자는 오른쪽 통행, 말의 속도제한은 시간당 5마일, 자전거는 시간당 8마일로 제한했고, 해뜨고 1시간 30분전까지 해지기전 30분부터 반드시 white light를 밝혀야 했다. 그당시 자전거 도둑과 사고가 자주 생겨서 'The National Bicycle Protective Company' 라는 보험회사가 생겼고 보험료는 자전거도난은 1년에 2.5$, 사고는 1.5$ 의 보험료를 냈다.
자전거는 살인적인 코르셋(murderous corset)을 벗어던지게 만들었다. 여성들이 바지입는 패션은 자전거를 타면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부자집 여성들의 그 시대 최고의 선물인 '시계'를 밀어내고 '자전거'가 최고의 선물로 자리잡았다. 아래 사진은 사진작가에 의해서 찍힌 사진인데 그 누드사진으로서의 의미보다 자전거가 주는 자유를 표현한 작품이다. 자전거를 소재로 한 자유연애소설 등도 많이 나타났다.
자전거는 결국 자동차가 출현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고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었다.
자전거는 1888년에 미국내에 5만대가 있었는데 1897년에 1백만대가 넘어섰고, 자전거의 폭발적 증가는 자전거타는 사람들의 도로정비에 대한 요구가 줄기차게 일어났다. 특히 미국 자전거 대중화에 기여한 Pope는 'Good Road Movement'의 주요 후원자(supporter)가 됨으로써 1891년 뉴저지주(New Jersey)에서 고속도로 개선법이 통과되면서 1893년 미국 연방 농무부(Department of Agriculture)안에 도로과(A Office of Road Inquiry)가 생기고, 미국내의 주요한 공원인 뉴욕 central park, 시카고의 south park, 필라델피아의 Fair mount park 등에 자전거 도로가 생겨나게 된다. (Pope는 또한 미국 최초의 자동차회사를 차리면서 자전거를 목락시키는데 기여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어떤 면에서는 유행을 쫒아갈 줄아는 대중적감각을 가졌고, 달리 말하면 돈되는 것이면 우선하는 철저한 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당시 미국에서 자전거로 인해 엄청나게 도로사정이 좋아졌고, 도로사정을 위해 자전거 타는 사람은 1년에 2$ 정도의 세금도 냈다.
1899년에 뉴욕에 처음 전기자동차가 나타나게 되고 1904년에 FORD 사가 한해 5,000대의 차를 양산하는 그 시점에 자전거는 완전히 역사에서 퇴조하고 만다. 이 시기는 자동차가 나타나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철도, 철길이 도시와 농촌간을 거의 잇게 되고, 자전거외에 다른 Sports 들이 급속하게 소개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어쨌든 자동차는 앞서 얘기했듯이 자전거가 이루어놓은 모든 기술적 유산들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자전거가 도입되면서 각종 사회문화적 변화들이 생겨나면서 이미 찬반논쟁을 다 거쳐놓았기때문에 자동차의 등장에는 아무런 논쟁이 사회적으로 발생하지 않았고, 개신교조차 아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더우기 자전거타는 사람들이 'Good Road Movement'를 펼치면서 길조차 자동차가 다니기에 너무 좋은 환경을 이미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자전거는 1900년대 초반에 와서 완전 퇴조하고 자동차에게 모든 영화를 넘겨주고 말았지만 20세기말에 이르러서 다시 그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면 자동차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을까?
출처 : 엔조이오디오
글쓴이 : jk s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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