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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동란 무렵의 사진 / 나의 자화상

2013. 12. 11. 17:41

  

내 어린 시절의 겨울나기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눈도 많이 왔고 바람도 드세었고

사람이 별로 없는 외진 곳에서의 겨울은 굶주림과 추위와의 사투였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 누구라고 해서 나을 것도 없는 겨울나기.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옛날 이야기지만 당시엔 너무도 지독했던

내 어린 시절의 겨울나기를... 오늘은 그 야기기를 할까 합니다. 

 

 

1950년대. 겨울은 참으로 추웠다. 그 추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어린아이.

 

 시골의 겨울은 참으로 춥습니다. 더욱이 먹을 것이 변변잖아서 마음까지 춥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건너 마을의 양조장 앞뜰 양지녁에 널려있는 술찌검지를 훔쳤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무서운 사람... 들켰다 하면 반죽음이란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익히 아는 바... 죽어라고 달렸습니다. 방향은 우리집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도주였습니다.

집으로 도망치면 잡으려는 자가 천천히 찾아와도 능히 잡히는 것을... 다행인지, 무사히 형제들에게로 왔습니다. 우리는 6형제입니다. 모두가 남자입니다. 나이가 고만고만했습니다. 형제들은 훔쳐온

술찌검지를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술찌검지는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먹고 나면 뱃속이 따뜻해지고

훈기가 돕니다. 얼마되잖는 것을 먹었음에도 뱃속이 부글부글 끊어올라 금방 포만감을 느낍니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의 훈기로 인하여 잠시의 추위를 이겨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곤 무엇보다

형제들은 괜시리 서로 마주보고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냐고 찡그리는 인상... 재밌습니다.

형제가 남긴, 아니 "너도 배고프지?"하며 술찌검지를 나눠 먹인 강아지와 함께 형제들은

따사한 햇볕이 스며드는 집벼락에 꺼져드는 것같은 몸을 의탁합니다. 그리곤 자기 꼬리를

물어보겠노라고 비틀거리며 뱅뱅도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모두 눈앞이 뱅뱅도는 것을

느끼면서 잠이 듭니다. 모두가 술에 취해 잠이 든거지요.

 

 

닭장같은 판자집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사람들의 아이들

 

그때는 왜그리 아이를 많이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형제도 6명입니다.

얼핏 어머니의, 엄마를 돕지 못하고 방해만 되는 우리를 보고 "그 애(계집애)가 죽지 않았으면

내가 조금은 편할 터인데..."라는 말속에서 이땅에 태어나 제 삶을 살기 전에 죽은 누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엌하나 방하나 그리고 헛간하나짜리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랫목 그리고 막내 그리고 엄마 그리고 형 그리고 우리들. 겨울엔 방안 윗목에 있는 오줌통이

늘상 얼어 있었고 문앞에 있는 걸레도 언제나 꽝꽝 얼었습니다. 엄마가 군불을 땐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아랫목만 뜨끈뜨끈할 뿐이며 그마져도 초저녁이면 사늘하게 식어버리고... 누워서 입을

벌리면 하얀 김이 입술사이로 새어 나왔습니다. 서로가 끌어 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코 넓지 않은 이불과 요, 8명이 자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얼음장같은 방바닥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오한을 저절로 안겨주는 허공으로 내 팔과 다리를 내놓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형제들은 서로를 꼭 끌어 안아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수레 가득히 나무를 해오는 소년

 

나무가지 없다면 겨울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먹는 것도 방을 덥히는 것도 모두

나무가지가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뒷산에 오르면 힘이 부쳐서

못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나무가지들이 있었고 또한 우리 집은 과수원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엔 아카시아 나무가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얼어있는 나무를 주워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에는 섬뜩한 가시

많았습니다. 얼어있는 살점을 그것에게 찔리고 나면 굉징히 아팠습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아픔이었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바른 양지녁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

 

내 어릴 때의 아버지는 평택시장통에서 사진관을 하셔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행상을 하셨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이모댁을 오가며 물건을 받아다 파시기도 했고 장날이면 바구니 하나가득 찐고구마를 머리에 이고 나가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본래 늦게 들어오시는 분이셨고... 우리 형제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가 오시면 어찌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내 새끼에게 하루에 한끼라도 먹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나가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해가 떨어져도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굶주린 배를 움켜 잡아야 했습니다.

 

 

양반 쯤 되는 조신신사께서 구걸하는 아이에게 길을 묻고 있다.

 

그래도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우리 형제는 동냥하러 다니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진의 아이와 같은 깡통을 들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천에 널린 개구리를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느다란 작대기를 들고 풀을 헤치다가 뛰어나오는 개구릴 때려 기절시킨 뒤에

깡통에 담습니다. 주먹덩이 처럼 큰 개구리는 뒷다리를 뽑아 구워먹고 몸통만... 그렇게 깡통

가득히 개구리를 잡아 양계장에 갔다주면 그것에 따른 적당량의 돈 혹은 달걀로 바꿔주곤

했습니다.  양계장에선 그것을 사료와 섞어 죽을 끓인 뒤에 닭에게 먹이면 토실해진다고 합니다.

 

 

시골에선 도저히 못살겠다. 빌어먹더라도 서울이 좋다며 삶의 터전을 떠나는 가족

 

집이 없던 우리 형제와 부모님은 기억에 담어두지 못할 정도의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어머님은 남의 집 살이가 지겹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형제가 여섯이나 되다보니

웬만한 집은 세를 주지 않았고 그 6형제가 날뛰고 또 날뛰는 바람에 나가달라는 소리도

들어야 되고... 주인 집 무서워 아이들 단도리하는 소리도 치지 못하고... 그래서 독채를

희망하셨지만 독채는 가격이 비싸기도 했고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네가, 또래들이 정겨워질만하면 이삿짐을 챙겨야 했던 내 어린시절...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무엇이라도 팔아서 자식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행상에 나선 여인들.

 

풀같은 멀건 죽. 입안에서 씹히지 않고 뱅뱅도는 밀밥. 쌀 조금에 보릿쌀 그리고 감자와 고무마

그리고 채소를 잔뜩 넣은 죽같은 밥. 어쩌다가 돈이 생겨 구더기 쌀밥이라도 밥상에 올라오면

형제들의 손놀림은 매우 날렵해집니다. 그 밥상에 두부찌게라도 겻들어지면 환호성이 저절로 납니다. 자식이 그리 좋아하는 것을 매번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 담에 자식 키워봐라. 이 에미 미어 터지는 속을 그땐 알게다."시던 넋두리...

자식을 키워가는 지금에는... 이젠 알것만 같습니다.

 

 

학교에 가는 걸까? 올망 졸망한 아이들.

 

나는참으로 배움이 부족합니다. 그날 그날 먹고 살기에 힘겨웠던 내 부모님은 자식들의

배움에 신경을 쓰거나 관심가질 겨를이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또한, 산골짜기는 아니어도

시내에서 외진 마을에 살았던 내 형제들은 10리길을 나서야 갈 수 있는 학교가 반갑질 않았습니다.

겨울철에 학교에 간다는 것... 지금과 같은 낭만은 없었습니다. 모질게 불어대는 눈바람을

혹가다 있는 포플러나무에 숨어 피하면서... 부두막에 올려놓아 뜨겁게 달구어진 넓직한 돌판을

몸안에 지닌채... 종종 걸리는 동상에서 무사하기 위하여 고무신 앞 발가락부분에 몇개의 고추를

넣고 집을 나서야 했던... 무릎까지 빠져드는 수북하게 쌓인 눈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동무와 동무 사이를 새끼줄로 묶어 나 다녀야 했던 그런 겨울에는 10리 길이 넘는 학교에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등록금이나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가져오라는 납부금을

우리 형제는 결코 나중에라도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구는 신문팔이를 하고, 어떤 형은 남의 구두를 딱아주고, 어떤 누나는 남의 애를

봐주는 그런 일로 인하여 생긴 돈으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우리 형제는 배운다는 것에 대한

열망이나 필요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배우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여견이 아니었다.' '황소라도 비벼볼 언덕이 있어야 하잖느냐.'

그런 말은 다 핑게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겐 배움에 대한 꿈이 없었습니다.

 

 

꺼져가는 화로불에 언 손을 녹이고 있는 자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은 나약한 볼을 헤집고... 거친 겨울 바람은 터진 손등을 할키었습니다.

발가락에 동상이 찾아오는 것은 년례 행사였으며 터지고 찢어진 손등과 목줄기에선 피가 나왔습니다.

목과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찬 바람은 몸을 더욱 춥게 하였고 두겹 세겹 겹쳐 신은 구멍난

양말로서는 겨울을 이겨내기 힘들었습니다. 뜨거운 물이 흔치 않아서 몇일이고 감지 않은 머리에는

속케들이 숭성숭성거리고 그런 우리에게도 먹을 것이 있었는지 형제들의 속옷에는 하얀 이가

흐드러졌습니다. 조금의 불. 조금의 따뜻함. 조금의 더운 기운에도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어머니가 지핀 군불로 인해 뜨겁게 달구어진 아랫목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넣을 때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화를 신고 있는 아이

 

미군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자주 주었습니다. 망치로, 돌맹이로 깨트려야 먹을 수 있는

딱딱한 분유이었지만 우리에겐 얼마나 맛있고 좋은 간식 아니 주식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장님께서 미군이 주었다며 가난한 집에 배급했던, 하긴 모두가 가난해서 받지 않은 집이 없었지만... 밀가루. 그것이 주어지는 날은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손길을 목을 놓고 기다립니다.

어머니의 손길에선 감자와 호박을 넣은 손칼국수도 나오고 멸치가 헤엄치는 수제비도

나왔습니다. 때로는 그것으로 군빵을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학교에 가면 옥수수 빵을,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라서 모두가 받았습니다. 지금도, 유명한 빵집과

소문난 케익이 생겨난 지금도 나는 그때 먹었던 옥수수 빵이 제일 맛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내가 당번을 서게 되면 급우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옥수수 빵을 몰래 가방에 숨겨

집으로 가져오곤 했습니다. 동생들이... 먹이를 물고 돌아온 어미새에게 쫑쫑거리며 입을

벌리는 아기새들처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몰래 숨겨온

옥수수 빵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이 그때는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먹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가지고 꼼지락거리는 소녀들

 

겨울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 형제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겨울엔 얼어죽어도 굶어죽지는 않지만 봄에는 굶어죽기도 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남의 콩밭에 기어들어가 훔쳐온 콩으로 콩딴지를 한 탓에 입주변이 검은 숯덩이가 되고...

땅이 녹을 무렵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칡을 캐겠다고 땅속을 휘집다가 뱀집을 건드려

죽어라 도망을 치던... 봄날의 상징이었던 소나무의 꽃가루(송아가루)를 모아서 물에

범벅을 해서 먹은 뒤에 똥구멍이 막힌 형제들이 서로 돌아가며 막힌 똥구멍을 뚫겠다고

막대기를 들고 설치던... 모든 것을 지금은 웃음으로 이야기하지만 속내는 아주 쓰라린

겨울에 이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봄나기일 뿐입니다.

 

 

검은 고무신과 지게 꾼의 오침

 

검은 고무신. 여름에는 당연하고 겨울에도 저 신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설빔으로 부모님으로부터 털신을 받게되면 양말을 신지 않아도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누가 훔쳐라도 갈까봐 품에 안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고무신 코에 몇개의 고추를 넣고(고추를 넣으면 고추 특유의 화끈거림으로 인해 동상을

예방할 수가 있었다.) 겹겹이 양말을 끼어 신은 발은 고무신에 가득 넘쳐야 했던 겨울이었습니다.

이후에 나는 30대부터 흰고무신을 즐겨 신었습니다. 검은 고무신이 좋았지만

색깔이 그러해서... 취급하기에 여간 까다롭지 않은 흰고무신을 애용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일하던 곳과 주변에선 나를 '고무신....'라고 호칭하곤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누구와의 만남이나 회의장에 참석할 때도 스스럼없이 착용했던 하얀 고무신... 남의 집 잔치에도 고무신을 신고 참석했던 나는 어느날, 나를 사랑해주던 이들의 주례를 서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때도 고무신을 신고 식장에 참석했는데, 신부의 어머니되시는 분이

"혹시 고무신을 신고 오시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고무신을 신으셨네...?" 남이 무어라하든

나는 한동안 아니 한국을 떠나 베트남에 오기까지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습니다.

내게는 고무신은 아주 편하고 오래가고 저렴한 신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 이렇게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길 할 수 있는 것은

하얀 쌀밥에 콩자반과 멸치볶음으로 도시락을 싸주시면서도 달걀후라이 하나 올려주었으면...

몇날이고 밤새운 뜨게질로 털옷을 입히시곤 솜잠바 하나 입혔으면...

남이 잠든 사이 홀로, 자식 새끼의 헤진 옷을 바느질과 동시에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이 알들을

입빨로 모두 물어 죽이시면서... 어쩔꺼나 불쌍한 내 새끼, 언제나 새옷을 입혀보나 하시던

어머니의 보살핌과 애정과 토닥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종종 사진과 글을 보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디서 그런 사진들과 글들을 수집(?)들을 하셨는지... 때로는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그 분께서 보내주신 내용중에서 그냥 받은 편지함속에 묻어두기는...

내 혼자만 보고, 아니 어쩜 많은 이들이 보았을... 이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이렇게... 나름대로의 내 어릴적 이야기를 담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펼쳐 내놓게 되었습니다.

출처 : 사랑하는 이들에게
글쓴이 : 스펀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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