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아시아나 서민들의 삶은 고단하다. 서민이라는 구분은 무엇일까? 없는 사람, 배경도 없고 돈도 없고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민초들을 말함인가? 그래서 서럽도록 고단한 삶을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그러면서도 백성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요즘은 좋은 세상이다. 예전이야 서민으로 태어났으면, 아버지가 서민이면 자식도 여지없이 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는데... 용빼는 재주가 있고 기회를 잡아 억만금을 손에 쥐었다 해도 양반의 반골이 아니면 그냥 서민일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임거정이나 홍길동같은 이들이 서민의 반대편 사람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이야 가난하고 힘없고 뒤돌아볼 겨를 없는 서민으로 태어났어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귀족과 같은 높은 위치에도 오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도 떵떵거릴 수 있는 부를 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세월이 그리 먼 세월이 아니다. 조선에 이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가듯 서민은 서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야 했다.
닭을 파는 남자
뒷짐 하나가득 닭을 담았다. 일명 닭장수다. 지금이야 이런 수단으로 닭을 팔았다가는 조류독감의
제공자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는 일이지만 1900년대의 이때는 앞마당에서 애지중지 길러낸
한 두마리의 닭을 장터에 내다 팔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십마리의 닭무더기를
팔 수 있는 이는 나름 앞마당이나 집터가 넓어 많은 닭을 키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굽갈이. 1903년 서울변두리.
1900년대는 교통수단 즉 이동수단이나 짐의 운반에 있어 말이란 없어선 안될 존재였다.
그 말에게도 신발을 신켜야 했는데 바로 말굽에 납작하게 발굽 모양처럼 만들 깔창을 달아야 했다.
말 발의 굳은 살을 깍아내고 2-3센치나 되는 쇠꼬챙이로 말굽과 쇠깔창을 고정 하였는데...
그렇게 하여야 단단한 길을 오래 갈 수가 있으며 말의 발목을 보호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일에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던지... 전문가가 있었으나 역시 그런것은... 서민의 몫이었다.
서울 콩가는 남자
시장 한모퉁이에는 콩을 갈아 콩국을 내고 콩비지를 만드는 아낙네들을 자주 볼 수가 있었으나
이렇게 남자가 맷돌질을 하는 것은 드믄 일이다. 그러나 서민에게는 남자가 하는 일 여자가
하는 일이 구별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설령 구별되어져 있었다 해도 니일 내일 따지며 살 수 있는
형편이... 서민들에게는 아니었을 게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여야 했을 게다.
숯을 파는 남자
사진을 찍은 서양인의 눈에는 이들이 짊어 맨 것들을 숯으로 보였을까? 내보기에는 나무같다.
뒷산이나 앞산에 올라 힘겹게 나무를 벌목하여 지게에 지기 좋게 정돈을 한뒤 시장에 내다 판다.
이때는 가스는 커녕 구공탄조차 없던 시절... 음식을 준비한다거나 특히 혹독한 겨울을 내기 위하여는 이런 나무들을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해서 사전에 준비하여야만 했다.
나무를 직접 구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양반네들에게 이들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식당
일명 저자거리에 있었음직한 주점이다. 술도 팔면서 식사를 겸해서 해결 할 수가 있는 곳.
대부분 국밥이었겠지만... 이런 곳에도 단골은 있었으니... 길가는 이에게는 허기진 배를
채울 겸 또다시 가야할 길을 위해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으로 당시엔 꼭 필요한 곳이다.
복을 기원하는 크리스챤들
크리스챤...? 기독교인들이 터부시하는 민족신앙의 장승들 앞에서 두손을 모아 기원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사진작가는 설명하기를 크리스챤이라고 하였을까? 두손을 모아서 일까?
손을 모은 다는 것은 정성과 복종을 겸한 간절함을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런 모습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말못하는 돌부처에게나 썩어가는 장승에게나 날짐승의 둥지로
이용되는 서낭당의 허수아비에게조차 이들은 두손을 모아 복을 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네들에게 찾아들 복이라면... 그래 많이 아주 풍성하게 안아 들었으면 좋겠다.
줄다리기. 뉴 서울우체국 앞에서 1903년
역시 이 사진도 그렇다. 줄다리기...? 줄다리기 같은 놀이는 아니고 땅고르기 같은 연합 작업같은데...
외국인의 시야로는... 긴줄에 여러명이 매달렸으니 그리 판단되었든 모양이다.
즐거운 추수군 1903년
가을 어느날 바람이라도 솔솔 불어주는 날이면 농부들은 벼나락을 정리하곤 한다.
요즘처럼 한번에 나락을 자르고 털고 봉지에 아예 담겨져 나오는 기계란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 낫으로 베고 수동 탈곡기를 이용하여 벼를 털고 그것을 양지에 말린 다음에
바람 좋은 날에... 겨는 겨대로 지푸라기는 지푸라기대로 벼는 벼대로 고르곤 했다.
몸은 고될지언정 쌓여가는 나락에 이들은 마음은 풍성해지고 꿈은 무럭무럭
영글어 갈 것이다. 1년의 삶이 이것에 딸려 있는 이들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게꾼 1899년
나무를 한 짐 짊어매신 노인. 군불을 피우기 위해선 이런 잔나무들이 때때로 필요하다.
이것은 팔기위함 보다는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산과 들에서 주섬주섬 긁어 왔으리라.
손주놈 부랄을 만지고 손녀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야 할 고회의 나이에도
허리가 휠 정도의 나무짐을 지어야 하는 삶이 고단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남은 가족이
따스한 겨울을 낼 수 있다는 것으로 노인은 웃음을 지을 것이다.
집 수리 흙 돌 짚으로 서울
집을 짓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한 경험과 손맵시가 있어야 한다.
집을 지을 수 있는 기계란 전무한 상태에서 집을 지으려면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한국의 집은 여름엔 시원하여야 하고 겨울엔 포근하도록 대비하여야 한다. 흙과 돌 그리고 지푸라기를 버물려 벽을 세우고... 미장이가 미장으로 마감을 하면 멋드러진 집이 생긴다
평양거리
지금이야 김일성 광장을 비롯해서... 상당하게 발전된 평양시라고 하는데
하핫~~ 아직 가보질 못했으니... 어찌 설명을 하여야 할까...?
항아리를 날으는 짐꾼들
옹이쟁이들이다. 흙을 떼내어 손으로 주물러 항아리를 만들고 유액을 바른 뒤에 불을 때어
항아리를 구어낸 뒤에 제법 쓸만한 것들로 골라 장에 내다 판다. 이들이야 말로 전문인이다.
지금은 전통 장인이다 하여 괘 대우를 받고 있는 이들이지만 사진의 당시에는 이들은
서민속에서도 천민에 가까운 대접을(?)을 받으며 한스러운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게다.
호랑이 사냥꾼
한국의 호랑이... 엄청 독했다고 한다. 용맹성과 고운 털과 날렵하게 생긴 모양새... 그래서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 그리고 정부 관리들이 엄청 좋아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만한 희생을 치뤄야 했으니... 해서 이렇게 전문 사냥꾼이 있었다. 이들은 호랑이와
대적할 수 있는 담력과 용기 그리고 한방에 호랑이를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다.
괜한 서툰 사냥질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결혼식 모습. 1899년의 서울
혼인식은 어디나라든 축제다. 새로 장만한 예쁜 옷과 치장들이 등장하고 모든 사람의 표정은
행복하기만 하다. 딸을 내주는 쪽에서는 뭔가 아쉽고 아깝고 어딘가 신랑이 미심적어 보이기
마련이고 신부를 맞이하는 쪽에서는 호박이 넝굴채 들어오는 것같고... 방긋 웃는 이가 있으면
찔끔 눈물 흘리는 이가 있기 마련... 이때는 어린이들에게도 모처럼 찾아온 기쁜 날이다.
새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모든 것에 넓은 아량과 풍성한 베품이 있는 날이다.
언니에게 혼났는가? 어른들에게 거치장스럽다고 밀침을 당했는가... 아니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주었던 언니가 남의 집으로 가는 것이 싫어서 일까... 두 아이중 어린 아이는
금방이라도 닭똥같은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얼굴이 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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